작가노트
 
Statement
 
 
작가-이매리
제목-‘Portrait of Shoe-그녀는 존재하지 않고 실존한다.'
작품캡션-입체 설치, 재생용 종이와 혼합재료. 3800mm, 2500mm, 2011.
 
 

 

나의 작업에서 보여지는 수많은 休滿(Human)들의 모습들, 그들이 이야기 하려고 하는 이 시대의 실루엣(형상) 들은 나 혼자 느끼는 개인적인 감정선들이 아닌 지금의 사회인들이 느낄 수 있는 공통된 공감대가 아닐까?.. 하는 다소 이기적인 생각에서 출발한다. 어느 곳에서나 볼 수있고, 주위에서 흔하게 느꼈고 보아왔던 이미지들과 상황들..인간이기 때문에 느끼고 想想하고 行했던 포괄된 모든 것들이 나의 머릿속과 그대들의 머릿속에서 그려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들의 형상과 이미지들을 조금이나마 유쾌하고 다소 냉소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인간은 항상 일탈이라는 것을 갈망한다. 지금의 자신을 버리는 게 아닌 잠시나마 지금의 현실을 잊기위해 삶-(모든걸 포괄한다)에서 지쳐버린 자신들을 위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을 바라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어려운 질문들을 접 할때 마다 생각한다.과연 나는 이 질문에 해답을 알면서 고민하는 것일까?.만약에 해답을 알고 있는 것이라면 어째서 그렇게 풀어 가지못할까?라고... 나의 작업에서는 그러한 풀이과정이 담겨있다 어떤 것들에서는 과정과 해답을 어떤 것들에서는 질문을 던진다.대답과.해석은 사람들이 해줄 것이다 믿고...마음껏 작업한다...내 손으로 만져지는 모든 이미지들과 형태들을....그리고 물어본다...일탈 할 수 있겠냐고 지금을 탈脫 할 수 있겠냐고....말이다. 틀에 갇혀서 살고 있는 지금의 모든 사람들.. 휴만(休滿,human)들에게 희망적인 메세지를 주고 싶다.

 

 
 
전시평론글
 
‘shoe의 초상- 그녀는 존재하지 않고 실존한다.’
 
 
글/김 하린
 
 

“하이힐이라는 도구의 무게 가운데는 가로수 가지와 반 쯤 떨어진 잎사귀들 사이로 느릿하게 사선을 그으며 쏟아지는 가을 햇살을 받으며 마치 노랑 물감을 흩뿌린 듯 은행잎이 깔린 보도를 가슴을 한껏 앞으로 내밀고 몸매를 뽐내며 천천히 걷는 여인의 당당함이 쌓여 있다. 높은 뒷굽은 은행잎 사이로 간간히 드러난 보도의 사각형 블록에 닿으며 여름방학 전전날 새벽 외갓집 안방 벽에 걸린 낡은 괘종시계의 둔탁한 바늘이 내는 소리처럼 거리를 물들이며 빌딩 사이로 사라져 간다. 이 하이힐이라는 도구에 스며들어 있는 것은, 스타벅스에서 치즈케잌에 바닐라라떼 한잔을 마시고 시작해야할 차가운 오피스에서의 하루에 대한 걱정과 임박한 아기의 출산에 대한 조바심, 그리고 죽음의 위협 앞에서의 전율이다.(일부 내용 <하이데거전집>5 Holzwege 19쪽을 인용하고 차용함)”
이매리의 <sho의 초상- 그녀는 존재하지 않고 실존한다.>라는 작품에서 등장하는 하이힐은 한 여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 세계를 읽어내게 한다. 이매리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것은 한 짝의 하이힐이지만 정작 작가가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하이힐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드러나지 않는’ 세계다. 그것은 바로 나머지 한 짝의 하이힐과 신발 주인인 한 젊은 여성과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다.
낙엽을 밟으며 지금 이 시간 거리를 걷는 그 여성의 있음(존재)은 현재로서 눈에 드러나는 존재로만 존재하지 않고 지나온 과거와 지금 이 시간인 현재와 다가올 미래라는 시간 속에서 존재한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이 여성은 여름방학을 외갓집에서 보냈다. 공부에 대한 압박감에 시달리던 소녀 시절, 외갓집 마을 앞 개천에서 물장구치며 놀며 머리를 식히던 여름방학은 큰 위안이 되었다. 힘든 대학입시를 거쳐 남들이 부러워하는 명문대학에 진학한 그녀는 학교를 졸업하고 역시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취직을 하였다. 입사한지 벌써 몇 년이 지났지만 어제 일처럼 느껴지는 과거의 시간은 루이비똥 한정판 가방을 들고 여름휴가 때 빠리의 마틴 마르지엘라 부띠끄에서 산 검은 색 원피스를 입고, 빨간 하이힐을 신고 지금 사무실로 출근하는 커리어 우먼으로서 오늘의 그녀를 있게 했다. 친척의 중매로 부모님의 마음에 드는 역시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적당한 남자와 결혼한 그녀는 훈남인 남편이 승진까지 빨라 주변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얼마 후 출산을 앞둔 그녀에게는 깊은 고민이 있다. 그것은 출산에 대한 불안감이다, 임신초기부터 그녀는 출산을 하게 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산부인과 의사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녀는 의사의 말이 자신을 달래려고 위로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엄습해 오는 불안감이 심해 신경정신과 상담을 받아보기도 했지만 불안감은 가실 줄 모르고 이른 새벽, 잠에서 깰 때마다 그녀는 죽음에 대한 극도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죽음을 직시하는 그 순간, 그동안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익숙한 모든 것들은 이제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변한다. 이제 곧 죽게 되는데 승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승진을 위한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 임원들의 애경사에 꼬박꼬박 다녔던 시간들도 부질없는 것이었다. 친정과 시가에서 돈을 끌어들이고 무리하게 대출해서 마련한 이 아파트도 내가 죽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책을 좋아 하고 결론이 빤한 드라마나 유치한 예능프로들을 보는 것을 싫어하는 그녀였지만 친구들이나 직장동료들과의 대화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티부이 앞에서 보내던 시간들도 무의미한 시간들로 변하고 말았다.
그동안 자신의 삶을 산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세상 사람들의 삶을 산 것이고 죽음의 불안 앞에서 이제까지 자신의 삶은 없었고 자신은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춤 춘 꼭두각시였다는 것을 발견한다. 불안이라는 기분을 통해서 그녀가 그동안 안주해 온 일상적인 세계는 의미를 상실하고 무화(無化)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장례식에도 참석했지만 죽음은 항상 다른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것이고 나 자신과는 아무 관련이 없고 마치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해 왔는데 자신의 삶은 죽음이 시간이 다가오면 사라져버릴 일회적인 것이라는 사실이 뼛속 깊이 사무쳐 왔다. 수많은 불면과 고통의 날들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소녀 시절 자주 걸었던 외갓집의 들길을 걸으며 생각에 잠긴다.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려고 애를 썼지만 다시 죽음에 대한 생각이 밀려왔다. 이번에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지우지 않고 오히려 더 깊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오래전 돌아가신 외할머니도 지금 내가 걷는 이 길을 걸으셨을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는 내가 이 길을 걷고 있다. 뱃속의 내 아이도 태어나면 미래의 어느 시간에 이 길을 걸을 것이다.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 노랗게 물든 들판의 벼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도 추수할 시간이 되면 이 들판에서 사라지게 되지요.”
순간 평소에는 눈에 보이지 않던 들풀이며 논두렁에서 꿈틀거리는 작은 생물들이며 들 길 사이의 나무들이며 멀리 신작로에서 노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오며 세상이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로움으로 다가오며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저 들판의 벼도 이제 얼마 후면 사라져 갈 것이다. 어린 저 아이들도 미래의 어느 시간이면 이 세상에서 사라져 갈 것이다. 들판의 벼나 저 들풀이나 사람들에게는 어느 것에나, 누구나 주어진 저마다의 시간이 있다. 저 연약한 들꽃도 어느 날 사라짐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아름답게 피어 있지 않는가? 나에게도 세상에서 주어진 시간이 있다. 나도 미래의 어느 시간에 이 세상에서 사라지겠지만 저 들꽃처럼 아름답게 피어 있고 싶다. 지나온 내 삶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이제 내 삶을 살고 싶다. 과거에 연연해 오던 모든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자. 내가 진정으로 이 세상에서 하고 싶었던 일은 무엇이었던가? 내가 살아있을 동안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가능한 일은 무엇일까? 그 일을 시작하자.
생각이 여기에 닿자 그녀는 온 몸을 감싸는 전율과 함께 죽음을 뛰어 넘는 마음의 평정을 느꼈다. 평온함과 함께 멀리서 들길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눈앞의 세상이 마치 이제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새로움과 충만한 기쁨으로 열리는 것을 보았다.
이것이 바로 작가 이매리가 <sho의 초상- 그녀는 존재하지 않고 실존한다.>에서 만들어낸 세계다.

작가 이매리의 작업실은 광주광역시 남구 봉선동 주택가의 한 치과 건물 일층에 있었다.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작업실 문을 열자마자 사람 키보다 훨씬 더 큰 빨간 하이힐이 눈에 들어왔고, 그 옆에서는 또 다른 거대한 하이힐이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벽에는 그녀의 수많은 작품들이 걸려 있었고 작업실 옆에는 아담한 서재가 있었다. 서재의 서가에는 수많은 책들이 가득 쌓여 있었고, 분야별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이매리는 까만 옷을 입고 있었는데 원피스였는지 셔츠에 바지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뜻밖이었던 것은 키가 크지 않고 보통의 아담한 키였다는 사실이다. 이매리를 만나기 전에 전시 도록에 실린 그녀의 사진을 여러 차례 본 적이 있었다. 그 때마다 나는 키가 무척 크고 깡마른 그녀를 연상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었는지 그 이유는 모르지만 아마 그녀의 거대한 작업들이 주는 무게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서재 벽에는 그녀를 찍은 커다랗게 인화한 흑백 사진이 걸려있었는데 사진작가 구본창이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전시 도록에서 자주 보던 바로 그 사진이었다. 구본창이 찍었던 무용가 김복희 씨의 사진이 생각났다. 구씨가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을 당시 김복희, 김화숙 무용단 공연 사진을 자주 찍었다고 한다. 그 사진에서도 체구가 작은 편인 김복희씨가 무척 커보였던 기억이 났다.
작업실에는 여자 조수가 있었고 커피를 내왔다. 커피를 마시며 작가와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포스트 미니멀 계열의 작업을 하는 그녀의 작품이 난해하다는 사전지식을 가지고는 갔지만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벽에 부딪쳤다. 작품에 나타나는 공간과 비어있음, 무에 대한 이야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는데 그녀가 자신의 작품에 나타나는 ‘시간’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앞이 막막해졌다.
다행히 때마침 점심시간이었고, 식사를 하러 가자고 했다. 어려운 곤경에서 빠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운전하는 아우디를 타고 부근 식당에 내려 점심식사를 했다. 황태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었는데 무슨 요리를 먹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식사하는 동안에도 그녀가 이야기했던 ‘시간’에 관한 생각에 사로 잡혔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치고 그녀의 작업실 옆에 있는 커피점에서 다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커피를 마시면서는 일부러 작품에 관한 질문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얘기를 해 봐야 내가 이해할 수 없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사무실로 돌아와 그녀의 작품에 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녀의 작품들을 보고, 다른 평론가들의 글을 읽으며 나는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어느 글도 그녀의 작품을 명확하게 설명해주지는 못하는 것 같았고, 내 나름대로 그녀의 작품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생각의 시작은 2007년 작품인 space-zero였다. 공간성을 유지한 채로 일정한 배열로 긴 가로형태(horizon line)의 슬레이트(slate)를 벽면에 이어 바닥까지 연결시킨 이 작품의 핵심적인 요소는 눈에 보이는 슬레이트가 아닌 보이지 않는 빈 공간이라는 것을 파악했다.
"비어있음은 곧 무(無)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이 무가 존재하는 슬레이트를 지탱하며 있게 한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렀지만 그녀의 작품을 설명해 주기는 미흡했다. 그렇다면 그녀의 작품에 시간은 어디에 있는가? 그녀의 작품들 속에서 시간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시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랜 고뇌의 시간이 지났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가 작품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본질이 빈 공간이나 무나 아닌 ‘있음’, 즉 존재(存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 생각을 단초로 또 다시 깊은 사색 속으로 빠져 들었다.
존재자(存在者)를 있게 하는 그 존재, 다시 말해서 ‘있음’은 무엇인가? 그리고 시간은 무엇인가?
그 사색이 만들어낸 생각이 앞에 쓴 <sho의 초상- 그녀는 존재하지 않고 실존한다.>에 대한 글이다.
몇 주 후 다시 이매리 작가의 작업실을 찾았다.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가 아버지의 고향이라는 작가는 어린 시절 걸었던 월남리의 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지금 내가 걷는 이 길을 할머니도 걸었고, 내 자식들도 걷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작가의 이 생각처럼 존재, 즉 있음 자체는 철저하게 유한하고 시간적인 존재인 구체적인 인간을 통하여 구현되기 때문에, 전통형이상학이 생각한 것처럼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불변적으로 존속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이고 역사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야기 끝에 문득 작가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작품을 만들어 내게 한다.’고 했다.
작가의 이 말을 듣고 하이데거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Wir kommen nie zu Gedanken. Sie kommen zu uns.”
(우리가 사상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상이 우리에게로 온다.)
문득 이매리가 작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존재(있음)가 이매리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빨간 하이힐 공간을 지배하다
 
 
곽규호(전남매일 문화체육부장)
 
 

흔한 화랑의 미술 전시장. 거대한 흰색의 큐브형 공간. 그림 그리는 이들마저도 선뜻 남의 전시가 열리는 갤러리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쉽지 않다. 그 속엔 권력과 권위의 코드가 숨어있다.

백색 전시장 한 가운데 거대한 하이힐이 놓여있다.

독자 여러분은 지금 이 책에 보이는 사진만으로 작품을 판단하지지 말기 바란다. 이 하이힐은 번지르르하게 윤기 나는 광택페인트를 칠한 작은 조각품이 아니란 점을 환기시켜드리기 위한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 99.9%는 이 하이힐보다 높은 키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하이힐의 길이(신발 사이즈?) 또한 위압적이다. 그 거대한 하이힐의 길이는 300㎝가 넘고 높이는 210㎝에 이른다.

이 글을 읽은 독자 여러분에게 제시되는 오늘의 첫 번째 과제는 이 빨간 하이힐을 어떻게 해석해야할 것인가이다.

이매리의 빨간 하이힐은, 크기를 제외하고 생각하면, 가장 먼저 성적인 코드를 연상할 수 있다. 전족, 패티시즘 등의 단어와 연결된다. 미국드라마 ‘Sex &The City’의 사라 제시카 파커가 연상되고 근대 심리학자 프로이드가 “발은 원초적인 성적 상징이며 구두는 여체를 상징한다”고 한 주장과도 상통할 수 있다.

하이힐은 신체를 왜곡시키면서 여성적 볼륨을 도드라지게 하는 숨은 도구이다. 거의 모든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는 굽 높은 투명한 하이힐이다. 피카소는 에펠탑의 곡선을 닮은 하이힐을 만들어 보였다. 국내에서도 박영숙이란 여성작가가 여성의 신발을 미술에 끌어들였다.

사진으로만 보는 이들에게, 빨간 하이힐은 충분히 에로틱하다.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하지만 여기서 감상을 끝낸다면 성실한 감상자가 아니다. 작가의 의도를 더 알아보기 위해서 작품이 놓인 방식과 공간을 다시 한 번 살펴봐야 한다.

일단 하이힐이 거대함을 놓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그 앞에 작은 책이 놓여 있고, 뒤엔 조그만 의자가 놓여있다. 의자는 신분, 안정성과 통하고 책은 지성·역사·언어 등의 대치물일 것이다. 그 한 가운데 놓인 거대한 빨간 하이힐을 ‘여성’으로 이해한다면? 사회적인 역사적인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난 ‘완벽한 존재’로서의 여성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거대한 하이힐은 백색의 큐빅 갤러리 한 가운데 세워짐으로써 공간 전체를 규정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다시 보면 소품으로 놓여 있던 책과 의자마저도 의미를 잃는다. 작가가 역설적으로 거대한 책의 형상 밑에 작은 힐을 설치한 ‘의도적 공간’이란 작품을 비교감상하면서 더 확연히 굳어진다.

그런데 공간을 지배하는 설치미술, ‘의도적 공간’ 등이란 용어는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이야기 아닌가?

이매리는 2008년 조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논문의 제목은「포스트 미니멀(Post-Minimal) 공간에서의 ’비어-있음'의 문제」이다. 고대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 아리스토텔레스, 근대 철학자 하이데거 등이 공간 특히 ‘없음(無)’를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먼저 살폈다. 그리고 고대 중국에서 오늘에 이어지는 도(道), 기(氣), 무(無), 이(理) 등의 개념을 살피고 무엇보다 ‘무’를 연구한다. ‘道可道 非常道’(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나,

‘천하 만물은 모두 유에서 생기는데, 유는 무에서 생긴다’(天下萬物지生干有, 有生干無)는 노자 도덕경을 인용했다.

그녀는 최근 미니멀리즘Minimalism-작가는 포스트미니멀Post-Minimal이라고 강조한다. 그 차이를 구별하는 일은 쉽지 않다-에 심취했다. 미니멀리즘이란 최소한의 행위, 표현으로 작품성을 드러내는 일이다. 기하학적인 형태와 선, 평면성, 단색조, 표현하지 않는 표현의 무위의 미술, 미술의 객관적이고 순수한 본질만을 보여주는 미술 등등이 사전적 의미의 미니멀리즘이라 할 수 있다. 미술사가 미니멀리즘 시대 쯤 되면 미술적인 것과 미술적이지 않은 것의 구분도 쉽지 않다. ‘무위의 예술’ ‘객관성’ ‘순수성’ 등의 단어에서 보듯 그것은 본질적으로 노자와 불가의 무위 사상에 상당히 유사하다.

이매리의 미니멀리즘은 평면과 설치, 입체와 공간을 모두 포함한다. 그런데 작가 이매리가 관심을 둔 ‘미니멀’은 공간+시간이며 이를 설명하는 데 존재와 부존재(無)의 개념이 유용하게 쓰였다.

동일한 규격의 막대가 동일한 간격으로 바닥에서부터 벽으로 연결된 작품들 ‘비어있음’ ‘Space-Zero’ 연작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조각품이라 할 수 없고 설치미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매리의 박사학위 논문을 잘 살펴보면 그녀는 존재와 부존재, 유(有)와 무(無)를 지극히 동양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無’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 눈으로 지각할 수 없는 뭔가를 발현하는 의미 공간이며, 시간적 공간으로서 무는 유와 동일하다. 불교적이며 도가적 세계관이라 할 이 아이디어를 작가는 그대로 작품을 통해 발현시켰다.

이매리는 이 규칙적으로 놓인 막대를 통해 “공간을 미니멀화한다”고 주장한다. 놓여있는 작품의 명암의 차이는 ‘그림자와 실존의 차이’와 같다. 관람자가 시야를 공간으로 확대해 작품으로 불린 ‘그것’이 놓여있음과 놓여있지 않음의 차이까지도 읽을 수 있다면 이매리의 ‘비어있음’을 완벽하게 감상한 것이다. 비어있음은 ‘비어-있음’인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하이힐 이야기로 되돌아간다. 이매리는 공간 안에 하이힐을 놓아둠으로써 공간 전체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결국 작품에서 하이힐만 보면 그의 작품세계의 반도 보지 못하는 셈이다. 공간 전체를 보면 다시 하이힐이 놓여진 부분을 제외한 공간 역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 것이고, 이것은 동양화에서 너무도 빠지지 않는 ‘여백의 멋’과도 상통한다.

하지만 현대미술을 모두 이렇게 어렵게만 감상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매리의 매력적인 빨간 하이힐을 Sexual한 이미지로 받아들이거나, 작가를 Feminism 전사로 생각하거나, 그가 그토록 열변하는 ‘비어있음’을 의도적 공간, 또는 미니멀 공간으로 생각하느냐는 소비자의 몫이다. 오늘날 순수예술은 대중예술과 크게 차이를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넘쳐나게 생산되고 있으며, 예술상품의 소비자는 대중사회 전체다. 그것은 오직 소비자이자 감상자인 나만의 의미체로 감상될 수도 있고, 교과서적으로 감상될 수도 있다.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현실 세계가 반영된 의미 있는 개념 미술
 
 
장 준석(미술평론가)
 
 

이매리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 중에서 상당수는 아마도 그의 작품과 작품세계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워하거나 또는 작품 제작의 계기나 배경 등에 대해 궁금해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작품의 형태와 스타일은 일반인들이 이해하기엔 쉽지 않은 면을 지니고 있고, 작품의 조형성 역시 일반인들의 정서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현대인에게는 다양한 볼거리와 시각적·정신적 체험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매리의 일련의 작품은 우리 시대에 펼쳐지는 다양한 조형 가운데 하나이며, 미적 가치와 아름다움을 지닌 새로운 느낌의 예술작품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매리의 작품은 개념성이 농후한 포스트 미니멀적인 실험성을 지녀왔고, 작가 자신이 흥미를 가진 우리의 정서가 흐르는 조형에 대해 꾸준히 접근해왔다.

현대 미술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더욱 다양해진 틀로 구성된 형식과 내용의 전개이다. 형식이란 간단하게 설명하면 외적인 스타일과 모습이라 하겠다. 반면에 내용은 그 안에 담겨져 있는 이야깃거리, 즉 정신성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형식은 그릇의 외적 모양과 같고, 내용은 그 그릇에 담겨져 있는 내용물이라 할 수 있다. ‘어떤 모양과 장식을 지닌 그릇인가.’와 ‘어떤 내용물을 담고 있는가.’는 현대미술 작품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부분이라 하겠다.

최근까지 이매리의 작품에서 보이는 여러 형태의 모습들은 작가만의 독창성을 지닌 스타일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사람이 어떤 옷을 어떤 형식으로 입었는가.’와 유사하다. 한복 등의 고전적인 옷을 입을 수도 있고, 양복 등의 정장을 입을 수도 있으며, 예상할 수 없는 개성이 강한 옷을 입을 수도 있다. 이매리의 작품은 일반인들의 시각에서는 개성이 강한 독특한 옷으로 보일 수 있다. 이 작품들을 보다 쉽게 이해하려면, 개성이 강한 스타일의 옷을 어떤 식으로 입었는가를 살펴보는 기분으로 접근하면 좋을 것이다.

이매리의 작품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회화나 미술이 아닌, 안티 회화적인 요소가 있다. 그런가하면 일정한 관념에서 탈피된 또 다른 형식을 추구하는 진보된 실험성과 동양성, 한국성, 현대성 등이 공존한다. 언뜻 보기에는 설치 등으로 이루어진 완벽한 서양의 후기 미니멀 형식으로 보이지만, 그가 추구하는 미술의 흐름에는 미니멀적인 요소와 유사한 동양의 무(無)나 공(空)의 사유 역시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최근의 작품에는 우리가 다른 후기미니멀적인 작품에선 느낄 수 없는 환원과 압축 그리고 인간 본질로의 접근이 될 수 있는 성(性)과 정(情)의 상황이 공존한다.

그 예로는, 한국인의 정신이 들어있는 석굴암을 압축하여 군더더기를 떼어내고 환원시킨 결과로 드러난 정방형의 흰색의 배열을 들 수 있다.(이 작품은 가장 최근의 실험 작품으로 아직 미공개 작품이다.) 사각형의 배열은 석굴암의 감실을 가장 단순하게 압축하면서도 석굴암이 지닌 본질로 접근함을 의미한다. 이 접근은 석굴암의 군더더기를 지움으로 더 완벽한 석굴암의 본질을 회복시키는 의미 있는 작업이다. 여기에 3차원적인 조각 설치인 작은 여성 힐을 상정함으로써 더욱 개념적이면서도 본질적인 접근이 되고 있다. 작은 구두가 마치 불상처럼 보이는 형상으로 화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상이라는 군더더기를 탈피하고 보다 근원적이면서도 본성과 하나가 되는 환원의 상태로 접근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매리의 최근 작품은 단순하게 서양의 후기미니멀적인 요소만이 흐르는 것이 아닌, 자연이나 삶 그 자체로 환원하는 물차체(物自體)의 흔적이 드리워진 것이라 생각된다.

이처럼 독특한 관점과 시각에서 펼쳐지는 작가의 조형성은 심플하면서도 다양한 스타일이 두드러짐을 볼 수 있다. 기하학적인 입체들이 공간을 차지하기도 하고, 때로는 단순화된 모노 계통의 색 층으로 이루어진 수평선을 가르는 듯한 바다와 같은 이미지가 펼쳐지기도 한다. 또한 차가운 형식의 틀 속에서 붉은 구두(Red Pumps)가 외면당하는 듯한 어느 공간에 배치되기도 하고, 때로는 어느 서양 작가의 오브제처럼 커다란 붉은 구두의 형태가 우리의 시선을 멈추게도 한다. 이 모든 것은 물자체(物自體)의 환원으로서, 곧 비어있음의 흔적들이라 하겠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은 단순한 화이트 등 모노 계통의 색을 구사하면서 3차원의 형태를 압축하고, 2차원적인 틀 안에서 또 다른 시각적인 환상을 불러일으킬 만큼 강한 조형성을 느끼게도 하는데, 이는 자연주의적인 것의 환영이자 물자체(物自體)의 이미지를 압축시킨 결과이다. 또한 확산의 현상과 환원의 현상이 거의 동시에 공존하는 느낌을 주는 특별한 공간을 통해 드러나는 후기미니멀적인 이미지의 창출은 그의 작품을 더욱 신비롭게 조형화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 개념적, 상징적, 자연주의적인 현상들이 하나의 신비주의처럼 드러남은 마치 어떤 신비로운 의상을 보는 것처럼 자극적이다. 이러한 면이 이매리 작품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시각적 효과가 있는 사진, 비디오, 영상 등을 활용해서 보다 감각적인 일루젼으로 변용시킴으로써 새롭고 신선한 시각 효과를 창출하고자 하였다. 그만의 독특한 이미지로의 변모는 일시적이지 않아서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하이힐 등의 3차원의 커다란 여성의 구두를 자신의 평면 작업과 공존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나무나 합판, 혹은 스테인리스 스틸이나 디지털 프린트 등의 재료를 활용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또 다른 영상을 이용하거나 3차원의 조각을 이미지화하여 독특한 시각적 효과를 얻기도 하였다. 디지털 프린트 등으로 드러난 시각적 이미지는 곧 작가 이매리의 감성적 정체성을 더욱 구체화시키는 데 일조하였음이 분명하다. 감성적 정체성이 조형성에 자연스럽게 흡수된 이후로, 우리가 보듯이 다양한 느낌과 이미지가 내포된 작품들이 또 다른 무(無)와 같은 새로운 미니멀의 형태로 만들어지게 되었음은 흥미로운 일이다.

어떤 경우에는 붉은 구두나 바다 등을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적 아이덴티티로 변화시켜 거기에서 자신과 한국인의 현대적 정체성을 찾으며, 때로는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적으로 조형화 해가면서 이들을 다양한 프레임 속에 대입시킴으로써 적극적인 변환을 추구하였다. 그런가하면 큰 흐름에서는 같은 선상에 있지만 이번 전시에서 주로 선보이는 평면 작업인 ‘다시 태어나다(Re-birth)’는 독특한 형식을 취하는데, 이는 마치 공기나 물방울 등의 크고 작은 원형의 물체들이 신비로움을 지닌 채 공중에 부유하는 듯한 모습으로 보인다. 가끔은 이 크고 작은 원형들 속에 사람의 모습 등을 그려 넣어서 우리 삶의 단편들을 새로운 공간과 형태 속에 드러낸다. 이러한 일련의 작품들은 모두 최근의 것들로서, 그동안 작가가 꾸준하게 추구해 온 것이며, 탈 미니멀적이면서도 초자아적인 이미지를 활용하여 2차원과 3차원의 세계를 공존시키는 흥미로운 작업이다. 이는 자신만의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구현시키는 작업이라 평가된다.

작가는 아이덴티티의 구현을 위해, 스테인리스 스틸이나 나무 혹은 합판, 아크릴, 에나멜, 에폭시 등의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여 3차원적인 구조를 2차원으로 현상시키는가 하면, 2차원의 작품 속에 있는 형상을 3차원 속의 공간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여기에 밀도감 있는 형식과 심화된 내용이 2차원과 3차원을 넘나드는 예술 세계를 더욱 구체화시키고 안정화시키는 데 힘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이러한 조형적인 상황들은 어느 한 순간의 감성이나 감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처럼 이매리의 작품은 큰 틀에서 볼 때 일관된 형식과 내용을 유지해 오고 있다. 특히 작가는 후기 미니멀적인 요소와 동양적인 사유들을 체험하고 즐기는 가운데 이를 객관화시키고 관객들과 소통하고자 하였다. 탈 미니멀적인 요소에는 시공간에 대한 압축과 단순화 등이 내재되어 있다. 마치 동양에서 전개되는 ‘무(無)’와 같은 성향이 함께하는 것이다. 이 ‘무(無)’는 곧 ‘비어있음’이라 할 수 있으며, ‘비어있음’은 곧 어떤 것도 채울 수 있는 가장 큰 상태이다. 나는 작가가 이처럼 후기 미니멀적인 사고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펼치는 것을 단순히 서양의 이론적·사유적인 접근일 뿐이라고만 생각하진 않는다. 지금까지 추구해오고 즐겨온 그의 사유 공간은 세계성을 지니면서도 무(無)나 공(空)의 이미지를 수용하여 한국적이며, 동양적인 선상에서 펼쳐지는 현대인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삶의 본질을 압축한 미술 작품을 통한 삶의 재해석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