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노트
 
하늘, 땅, 고요
 
조근호

자연(自然) 속에 하늘과 땅이 있고 여기에 고요함이 있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하다는 뜻이다. 사람의 힘을 더하지 않은 천연 그대로의 상태를 말 함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오면서부터 인간의 힘이 자연에 더해지고 그 흔적은 문명이란 이름으로 자연과 어울려 존재해 오고 있다. 넉넉한 품으로 인간의 흔적을 감싸 안은 채 인간과 잘 어울어진 자연의 모습은 그대로 아름답기만 하다.
나는 이러한 무심한 듯 한 묵묵함이 좋다. 나에겐 강렬한 색채도 무심한 자연색만은 못하다. 나는 이 무심한 자연 속에서 끌어 낸 무아정적(無我靜寂)의 선(禪)을 정신 수련의 기본으로 삼고 있는 동양 정신의 근원인 고요함(靜)을 작품의 주제로 작업해 오고 있다.
나의 최근 작품은 카메라 초점을 흐려서 찍은 사진처럼 흐릿하며 은은한 화면에 색이 절제되어 단색조에 가까운 담백한 색채로 표현되어 여기에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고요함이 있다.
마치 잠에서 막 깨어나 눈앞에 어렴풋이 드러난 풍경을 보는 듯 몽롱하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함으로 화면은 정적에 쌓인다. 그러나 시선을 고정시키고 가만히 드려다 보면 여기엔 고요함 속에서 조용히 들려오는 대기가 흐르는 소리가 있고 살랑이는 바람결에 잔잔한 물결의 움직임과 수면 위에서 석양빛의 영롱한 반짝임이 포착된다.
이렇듯 있는 듯, 없는 듯 한 색채나 흐릿한 형태로 번잡스러움을 제거 해버린 작품 속 고요함은 동양 정신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정(靜)적인 요소를 작품에 끌어들여 선(禪)의 경지까지 도달하고자 하는 나의 의도가 깊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나는 물이 있고 산이 있는 풍경들을 주된 소재로 삼고 있다. 이러한 소재는 군자 요산요수(君子 樂山樂水)라 하여 전통 산수화에 자주 등장한 소재이다.
나는 전통정신에서 새로운 것을 재발견해 보고자 선인(先人)들이 즐겨 찾았던 소재를 선택하여 이 시대의 시각으로 현대적 재해석을 통한 작업을 해 나가려 한다. 아시아적 전통정신의 뿌리에서 이 시대를 대변할 건강한 작가정신의 싹을 틔워 보고자 함이다.
현대에 와서 기계문명의 발달에 힘입은 다양한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미술에 도입되고 있어 작품의 표현 방법은 더욱 다양하게 펄쳐지고 있지만 이 시점에서 작가의 내면에 깊숙이 내재 되어 있는 작가정신은 시대와 자신을 정확히 들여다보고 정확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신의 본질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 한다.
이 고요한 풍경 연작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고요함은 앞으로도 내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풀어 나가야 할 화두로 등장할 것이다.
고요함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 현대 사회에서 지쳐있는 현대인들에게 안식의 시간을 가져다준다.
나는 아시아의 전통정신에 뿌리를 둔 작업을 통해 현대인들에게 한숨 돌리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고요하고 편안한 안식의 시간과 세상을 향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 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