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노트
 

 

잃어버린 순수

 

 
 

나의 작업의 큰 테마는 잃어버린 순수성이다. 아마 그 속에는 참 인간세상,즉 좋은 세상이나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삶의 진실이나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하고 싶기 때문 이다. 이러한 세상은 현대에 들어와 더욱 발전된 과학과 문명으로 인해 서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가 팽창 하였으며 그런 삶과 사고는 현대생활의 메마른 정서를 낳게 되고 우리의 사회생활에서 감성적이고 윤리적인 질서를 많이 잃었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엔 자본주의에 의해 빈부차가 심해지면서 생기는 무질서와 혼돈 때문에 아픈 가슴을 가진 사람의 대변이라든가 치유하는 입장이 강했으나 결코 병이든 것은 이들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성의 세상이 지배하면 할수록 인간세계의 한계가 나타나고 이는 잃어버린 우리 가슴속의 정(情)만이 순수를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동양사상을 잠깐 살펴보자. 퇴계 이황의 사단 칠정론(四端 七情論)을 보면 사단은(맹자에 나온 말)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말하며 자신의 이해관계 등을 따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즉각적으로 발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그러한 마음은 이익이나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파생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본래적인 성향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칠정은(예기의 예운 편)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을 말하며 배우지 않고도 될 수 있는 것이며 자연상태로 방치하면 악을 산출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를 주자학으로 살펴보면 만물은 이(理)와 기(氣)라는 두 요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존재의 법칙이며 실천적 당위의 원리이고 보편적인 질서를 근거하며 보편성,무한성,선험성,형이상 등으로 특성 지어진다 ‘기’는 이에 반하여 현실적으로 드러나게 해 주는 것이며 동시에 가려주는 존재이다 그리고 현실적인 존재성을 갖기 위해서는 개별성의 원리이며 개별성,변화성,유한성,형이하 등으로 특성 지어진다. 이러한 이기론이 심성론과 수양론에 적용될 때 인간의 수양목표를 ‘기’ 적인 것이 근원 하는 인욕(人欲)을 누르고 천리(天理)를 보존하는 것으로 설정하게 된다. 여기에서 ‘이’는 ‘기’를 통해 구체적인 모습을 나타내는데 이를 정(情)이라 한다. 결국 ‘사단’인 측은히 여기는 마음(仁)과 악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義) 그리고 사양하는 마음(禮)과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知)을 ‘기’의 작용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며 이를 실현하는 것을 말한다.
결국은 인간다움이 나에게 있어서 중요한 문제이며 데카르트의 말처럼 인간이상도 이하도 아닌 인간의 입장에서 진리와 방법적으로 탐구하여야 하고 신학자의 은총의 빛보다 자연의 빛에 의해 세계를 인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했다.산업혁명시기에 신학중심의 학문체계에 반기를 들었던 인간다운 학예(學藝)운동처럼 인간개념을 잃어버린 감수성을 살펴보고  새시대의 이상적 인간상을 실현하여 보다 인간다운 인성을 찾아가는 게 잃어버린 순수가 아닌가 한다. 세상을 보면 어두운 면에 가슴 아파할 때가 많다. 이는 기실 모든 인간들의 책임일수도 있으며 의무 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속에 예술가가 있다.

 

박수만(서양화)—작가론

 

 

전시평론

 

 

박수만의  덜 약삭빠르고, 덜 민첩하며, 덜 자기방어적인 인간형(人間形)

 
 

 

1. 박수만의 회화는 연한 분홍색을 기조로 하는 일종의 인물화이자 풍속화이기도 하다. 이 주조적인 색조는 그의 회화 전반에서 어떤 종류의 급진성이나 과도함도 배제하는 역할을 한다. 이와 함께 일관되게 수평적인 터치들의 결합은 그 각각의 주제나 소재, 메시지가 무엇이건, 그의 회화가 정서적인 온화함과 안정감을 유지하는데 기여한다. 이로 인해 주름이 때론 깊게 패어 있고, 깡마른 신체에 양팔이 보이지 않는 경우조차 단지 비극의 단초로만 독해되지는 않는다. 
 그의 회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예외 없는 회화적 변형에 의해 고유하게 성격화되어 있다. 그들의 얼굴이 우선 충분히 패턴화되어 있다. 이마에 선명하게 패인 주름은 그가 살아 온 생의 여정이 어떠했던가에 대한 일종의 기호적 지표다. 눈썹은 몇 개의 점선으로 도식화되어 있고, 코는 적절하게 거리를 두고 있는 두 개의 점과 명료하지 않은 명암에 의해 묘사된 낮은 콧대로 이루어져 있다. 코 옆 부분에 위치한 가로방향의 진한 터치는 돌출된 광대뼈의 함축된 묘사에 해당된다. 위 아래로 각각 두 개의 선으로 희화화된 입술은 그 간격을 통해 때론 조금 열려있거나 굳게 다문 다양한 표정들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 우스꽝스럽게 축약, 묘사된 얼굴과 머리의 스타일, 과장된 목 부위와는 표정에 담긴 심각성을 완화, 또는 둔화시킨다.
 그럼에도 그들이 아마도 전형적인 한국인의 도상으로 읽힐 여지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신체적 얼굴 때문이기 보다는, 내적인 진실의 반영인 표정 때문일 것이다. 어눌하게 축약된 얼굴이 만들어내는 표정은 다소 근엄하고 경직되어 보인다. 상대적으로 크고 넓적한 얼굴에 비해 유난히 작은 눈이 비중으로 인해 표정은 자주 모호하고 중립적이지만, 그 행간엔 얼핏 어떤 회한과 자조, 체념과 관조, 그리고 때론 다소의 긴장과 불안의 흔적이 배어있다. 작품 <내 안의 일상>은 얼굴에 대한 박수만의 관점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에 의하면, 얼굴은 기억의 저장과 관련된 일련의 시간적 기제다. 얼굴은 그 자체로 역사적 내러티브다. 표정은 과거라는 재료들로 만들어진 시간의 작품이다. 귓전에는 오래 전에 ‘들었던’ 것들이 여전히 속삭인다. 코는 옛사람의 냄새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 어떤 것도 ‘지나가버렸다’거나 ‘사라졌다’고 서술되지 않는다. 현재를 산다는 것은 과거를 거닌다는 것에서 조금도 덜어져 있다 않다. 얼굴은 그자체로 과거며 현재고, 또한 미래다. 왜 아니겠는가!

 

2. 박수만의 인물들은 모두 하나같이 알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실존을 은폐하고 가리는 사회적 기제의 전적인 부재에 의해 이해될 수 있다. 그들은 전적으로 노출된 상태며, 그것은 사회적 차원의 부재를 또한 의미한다. 즉, 우리는 그들이 사회라는 공공영역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 지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 그들은 농부거나 법관일 수도 있고, 교사거나 학생일 수도 있다. 사회적 지위의 고하, 명예의 유무, 귀천의 구분에 대한 어떠한 외부적 참조도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남자거나 여자며, 누군가의 부모거나 자녀며, 한 가족이나 사회공동체의 일원이이라는, 지극히 생래적인, 곧 존재와 실존 자체로부터 유래하는 것들을 제외하고선 말이다. 여기서 그들은 모두 실존이라는 공통의 근거만을 알리바이로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것이 하나의 존재론적 텍스트라면, 그것은 매우 희화적인, 그러나 어떤 상징성이 가미된 텍스트임에 틀림이 없다. 신체는 고유한 방식으로 변형(deformation)되어 있다. 이 변형에 의해 하나의 몸통에 두, 세 개의 머리가 붙기도 하고, 앙 팔은 아예 누락되어 있으며, 다리는 가늘고 길며 무릎 관절은 병적으로 각져 있다. 두상은 확대된 대신, 몸통은 왜소하고 뻣뻣하며 부자연스럽다. 대부분의 여성은 다소 길게 늘어진 젖가슴이나 상대적으로 조금 더 둥글게 처리된 골반 부위 정도로 약술된다. 때론 짧은 머리와 몇 개의 점으로 된 목젖이 그가 남성임을 확인하는 유일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생략되거나 강조되고, 변형된 박수만의 인간들은 훨씬 더 어눌해 보인다. 그들의 큰 머리와 생략된 양팔, 그리고 뻣뻣해진 다리는 그들의 반응양식과 운동을 심각하게 제한할 것이 분명하다. 이로 인해 그들은 변형이전의 정상인보다 덜 약삭빠르고, 덜 민첩하며, 덜 자기방어적일 수밖에 없다. 아마도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지는 난처하고 고단한 상황들 속에서, 그리고 점점 더 가열찬 것이 되어가고 있는 생의 경주에서 (훨씬 더 흔한 인간형인 발 빠르고 손이 잰 사람들만큼) ‘잘 해낼 수 없을 것이다. 세련된 표현어법이나 오차없는 셈, 전략, 기회주의, 즉물적 성취주의 따위가 그들 몫의 서술일 개연성은 실로 낮다.
 그런데, 바로 이 결핍과 부재, 부적절함으로 인해 그 표현은 훨씬 더 흥미로운 현대인의 풍자가 된다. 작가의 독특한 변형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것에 의해, 우리는 ‘특이할 것이라곤 없는’ 일상적 삶을 사는 사람들, 곧 우리 자신이기도 한 인간형과 ‘정확하게’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박수만의 2008년 작 <인생>에서 그들은 각자 자신의 번호표를 달고 달리는 마라톤 선수로 비유되어 있다. 그들은 모두 열심히 달리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신기록을 내지는 못할 것이다. 아마도 우리들처럼 말이다.

 

3. 때로 박수만의 인간들이 주고받는 대화는 모호하고 허공에 산화된다. 소통은 단절되고 독백으로 종료된다. 화면 곳곳에는 이해할 수 없는 사고(思考)의 단초들, 앞뒤가 잘려나간 기억의 편린들, 희미해져버린 추억, 또는 어떤 고백과 내밀한 것들의 발설이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방식은 아마도 ‘주관적 도상학’이라 해야 할 것으로, 그것들을 관류하는 맥락을 정확하게 독해해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의 회화가  ‘중얼거림, 독백, 상념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정의되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박영택) 그렇더라도, 박수만의 독백의 주체는 독자(獨子)로서의 자아가 아니며, 그 독백은 대화의 한 형식이다. 그들은 서로로 인해 존재하고, 서로 앞에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신학자의 은총의 빛보다 자연의 빛에 의해 세계를 인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데카르트를 인용한다. 하지만, 그의 세계에 깊이 배어있는 ‘인간주의’가 보는 인간은 데카르트의 회의적 인식론자로서의 인간을 훌쩍 넘어선다. ‘타자는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적 실존주의도 박수만의 인간을 담아내기엔 부적절한 그릇이다. 그들은 혼자일 때조차 끊임없이 대화를 제안하고, 자신의 독백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담론(談論)이란 것도 결국 밥상머리에 마주 앉은 인간의 상호작용일 뿐이다. 그것이 손자를 등에 업고 있는 할아버지와 무엇이 다르랴! 이는 작가가 퇴계 이황의 사단 칠정론(四端 七情論)을 논하는 것에 의해 더욱 분명해진다. 예컨대 인.의.예.지(仁義禮智), 곧 측은히 여기는 마음(仁)과 악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義), 사양하는 마음(禮),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知)의 실현이 타자로 나아가는 길목에서가 아니라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일까!  
 박수만의 인간은 결코 독처(獨處)하는 인간이 아니다. 작품 <뫼비우스>를 보라.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에 얽혀 있으며, 때론 투정으로 때론 연민으로 서로를 마주하는 인간이다. 그들은 서로 맞물려 있고, 그로 인해 생은 혼자 풀어낼 수 없는 마법이 된다. 세상은 그들이 함께 모여 만들어가는 신비로운 큐빅이다. 결국 세상이란 이 특별할 것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사람들이 다양하고 흥미진진한 관계들의 유형에 다름 아니다.
 박수만의 인물들은 서구의 인식론적 패러다임이 오랫동안 간과해 온 길목에서 진정한 생의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미술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