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노트
 

 

사람들의 손길은 모든 것들을 변화시킨다. 그 변화가 순수하면 그 순수함은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그 변화가 순수하지 않다고 해도 결국에는 위대한 순수에 의해 잊혀지게 되고 말 것이다.
도시를 계획하고 건설하고, 또 다시 계획하고 재개발하고 하는 과정들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그 계획들이 권력과 욕망에 의해 지배당한다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한 시대의 해프닝일 뿐, 위대한 순수에 의해 다시 잊혀질 것이다.

 

- 강은구 작가노트 중

 

 
전시평론글
 

 

Night for All

 
 

 

작가에게 재료가 어떤 의미인지 작품을 보는 관람자가 질문하는 것은 어쩌면 어리석은 일일 지 모른다. 특히 철을 재료로 도시의 밤을 그리는 강은구 같은 작가에게 철은 작품의 재료이기 이전에 그가 현실을 보는 툴이자 궤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만큼 강은구는 철이라는 재료를 떨어뜨려놓고 말하기 힘든 작가이지만, 이것은 그가 작가가 아니라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에게 철은 조각과 구성을 위한 재료가 아니라 멀리 하려 해도 늘 지글거리는 생활 속에 있는 그 자체로 충만한 물질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작가 아버지의 공간(청계천의 금속 가게)에 가득했던, 철이 잘리고 움직이는 소리와 그곳을 가득 채웠던 냄새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작가가 외면하고 싶은 대상에서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체화된 작가의 감각이 되었다. 이 감각은 무엇인가 만들려 하는 조형의지와 구체적인 지금 여기를 바라보는 현실 인식이 겹쳐진 것이다. 철은 그에게 와서 까만 도시의 밤이 되고 조명을 담아내는 어둠의 공간이 된다. 금속은 생각보다 부드럽고 습도와 온도 등의 상태에 따라 색깔이 다르다는 작가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자신이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재료 철을 팝업 형식의 레이어로 둔갑시키며 도시의 밤을 제작해낸다. 철이라는 재료가 강은구에게 그러하듯 ‘도시의 밤’이라는 작가가 그려내고 있는 전체 풍경 또한 강은구에게는 답하기는 힘들지만 자신이 가장 알고 싶었던 것이다. 첫 개인전 이후 지속적으로 몰두하고 있는 도시의 밤은 이번 전시에 이르러 ‘모두의 밤(Night For All)’이 되었다. 철제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조명의 빛과 기운 때문에 강은구의 작업은 첫 눈에는 풍요롭고 환상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현실에서 그가 바라보고 마주한 밤들이 결코 ‘모두의 밤’이 될 수 없는 것 아닌지 반문하고 의심하고자 한다. 아늑하게 보였던 도시의 밤 풍경은 이번 전시에서 좀 더 다층적인 겹겹의 실제 상황을 담아내는 듯 보인다. 아현동 재개발지역과 이름을 알 수 없는 고층빌딩, 그리고 그 사이 보이는 철장 등 도시는 어떤 다른 숨겨진 드라마를 보여주기 위해 꿈틀거린다. 건축적인 설계 과정을 거쳐 직접 철을 다루며 밤의 도시를 점검하는 작가는 "도시의 암울함"과 그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역설적이게도 더 아름답게" 보여주고자 한다고 말한다. 작업실을 이동해야 할 때마다 겪었던 도시 거주자로서의 고충들과 한 여름 작업실을 고치는 데 소나기와 함께 뜬 환한 무지개 등은 따로 떼어낼 수 없는 작가의 체험이며 이는 작업의 출발점이 된다. 그런 점에서 강은구가 그려낸 도시의 밤은 낯선 이물감과 익숙함이 공존한다. 도시의 낮과 밤, 발전과 쇠락이 그가 보는 도시의 장면 곳곳에 숨어있다. 금속과 이에 투사되는 빛을 이용한 도시의 장면은 사각형의 구도 안에서 익숙하게 반복되지만 들여다보면 볼수록 얇은 1mm의 철은 아슬아슬하게 높이 솟은 건물들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종교의 도상, 또는 모여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채로운 차이들을 드러낸다. 빛이 꺼지기 직전 도시는 마지막 불을 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제 환해지려는 것일까. 이번 전시장에 작가는 '셔터가 반만 열려있는' 축소된 을지로의 골목 풍경을 가져다놓았다. 철로 그려낸 도시의 전체 풍경 이면에는 이처럼 외부와 셔터로 차단된 좁은 공간에서 끊임없이 무엇인가 만들며 '밤'을 보내는 이들이 있다.

 
 

글 현시원(미술이론)

 

 
 

 

도시 자체가 발하는 ‘위대한 순수’의 설화

 
 

 

강은구는 도시를 재현한다. 밤의 도시, 또는 도시의 밤이 그의 모티브다. 강은구의 도시들은 그 자체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엇보다 금속은 그에게 있어 가장 친숙한 질료다. 그는 철 역시 시간 안에 존재하면서 역사를 산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철도‘사람의 감정처럼’온도와 습도에 반응하면서 주변에 반응한다는 점이야말로 그가 철에서 목격하는 미학의 한 핵심이다. 그가 금속의 정서적 차원을 목격했던 시기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년 넘게 부친이 운영했던 금속 절단가게를 오갔던 덕으로, 그것에는 부친의 시간이라는 기억마저 담겨있기 때문이다. 강은구가 단지 철의 표면에 남겨지는 역사의 흔적인 녹에서만 감흥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스테인레스 스틸의, 예컨대 철과는 다른 그 독특한 색감과 질감이야말로 그에게는 안료에 결코 뒤지지 않는 조형적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강은구의 도시를 구성하는 또 하나의 본질적 요인은 빛이다. 빛은 언제나 도시의 뒷 배경으로부터 발현되면서 고층 빌딩들과 창문들의 윤곽을 드러낸다. 하지만 뒤로부터 오는 빛은 언제나 충분히 중성적인 건축물들의 실루엣만을 강조할 뿐이다. 그것에 의해 도시는 한층 현란한 야경을 재현해내는 듯하다. 하지만, 이 도시에서 실체는 다만 (때론 투박하게) 절단된 금속면들과 인위적인 빛이 조율해내는 빛과 어두움의 원시적인 이중주일 뿐이다. 그것은 일테면 가장 원초적인 질료로 구성된 가장 현란한 풍경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강은구가 도시 전체를 어둠에 잠겨있게 함으로써, 즉 도시의 모든 세부들, 부산한 작동들과 온갖 부수적인 요인들을 생략함으로써 하나의 존재로서 도시 자체를 드러내는데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작가의 도시들에서는 최소한의 행인들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는 우리의 감각이 그 세부들에 집착해 온 탓에 보지 못했던 전체를 우리의 목전에 제시하기 위한 중요한 미적 전략일 터이다. 이렇듯 강은구는 도시의 존재, 그것의 물질성 자체와 그것에 내재하는, 일테면 오로지 도시만이 가질 수 있는 미(美)의 어떤 차원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강은구의 세계는 차가운 금속성과 불가해한 빛이 만들어내는 한 편의 서사극이다. 그가 만들어내는 도시는 가장 물질적인 것인 동시에 가장 비물질적인 어떤 정서적인 것이 결합해 있는 형태, 차가운 것들로 된 결코 차갑지만은 않은 세계다. 작가는 도시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드라마들을 언급하지 않는다. 권력의 게임들, 사랑과 미움의 드라마들, 성공과 실패의 일화들에는 시선을 주지 않는다. 그가 관심을 기울이는 주제는 오로지 존재 자체로서 도시다. 도시의 기하학적인 피부, 결국은 이런저런 정서의 편린들로 귀착되곤 하는 도시의 질료, 물질적 본성, 그리고 그것들에 의해 암시되는 도시의 역사, 순환 … 작가는 그것을 도시의‘위대한 순수’로 함축한다. ’.

 
 

심상용 (미술사학 박사, 동덕여자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