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격동기의 보헤미안 양 수 아

천부적 재질현해탄 건너 畵道의 문 열다
일본인 교장 눈띄어
日서 본격 그림공부
중학시절부터 두각

 

양수아는 1920 1 13일 보성군 겸백면 덕음마을에서 양계환(梁桂喚)씨와 박순례(朴順禮)씨 사이의 3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회식(會式)이고 수아(秀雅)는 아호다. 그는 평생 아호를 사용했다. 가세는 중농이었다. 양수아의 막역지우 조용근(전 목포북교ㆍ나주중앙초등학교 교장)씨에 의하면 그 시절에도 대문의 문패에는 두 분의 이름을 함께 써놓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진보적 경향을 엿볼 수 있고, 이런 영향을 양수아는 기본적으로 뇌리에 새기며 자라났다.
겸백면사무소에 근무하기도 했던 양계환 씨는 멋진 한량춤을 잘 추는 풍류객이었다. 손재주 또한 좋아 결혼식에 사용하던 문어발 봉황조각 솜씨는 인근까지 명성이 자자했다. 고향 마을 석호리는 마을 뒤로 해발 500m정도의 초암산(
草岩山)이 서 있고 마을 앞에는 강폭 70m의 보성강이 흘렀다. 50호 정도가 형성된 아름다운 농가였다. 가계를 거슬러오르면 수아의 15대 조부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에 이른다. 그는 조선시대 학자이자 문인화의 대가로 호남 화단 원조 중의 한 사람이다. 기묘사화를 입은 조광조가 사사되었을 때 그가 취한 행적은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역적의 시신을 거두면 삼족이 멸문지화를 입는 것이 법이었지만 양팽손은 그 시신을 염습할 만큼 강직하고 의리가 굳었다.
"
이 사람들과 지하에서 상종하지 못하니 홀로 살아서 무엇을 한단 말이냐?"하며 스스로 울타리 없는 영어(
囹圄)의 세월을 보내며 절죽도를 그리던 기개와 성품은 후손 양수아에게도 각인됐을 것이다.
더 거슬러 오르면 '양씨는 탐라국(제주도)으로부터 나왔으며 원래는 양(
)씨 성으로 입문해 뒷날 양()으로 바꾸었으며 순()이라고 하는 분이 바다를 건너 신라에 와서 벼슬해 한림학사에 올랐다'고 기록돼 있다.
양수아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남다른 재질을 보였다. 그가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은 당시 그가 다니던 겸백공립보통학교 교장이었던 미가미의 눈에 띄면서부터다.

 

남들보다 한두 해 빠른 나이에 보통학교에 입학한 수아는 일찍이 그림 그리는 일에 빠져들었다. 교과서나 공책은 온통 그림 낙서로 채워졌고, 학교나 동네 담벼락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그리는 그림은 일본 소년잡지에 나오는 일본무사(사무라이)들이었는데 책에 나오는 그대로 모사해내 주위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곤 했다.
어느 날 미가미(
三上勳一) 교장이 수아의 집에 찾아왔다. 그는 수아에게 그림공부시킬 것을 수아의 아버지에게 진지하게 권했다. 수아가 천성적으로 그림재주를 타고 났음을 일찍이 간파해냈던 것이다. 미가미는 그림에 대한 정열만은 누구 못지 않게 깊이 간직한 실패한 화가였다. 양수아의 재능을 아끼고 사랑했던 그는 수아의 그림을 들고 학급을 돌아다니며 자랑할 정도였다고 한다. 미가미의 눈밝음이 마침내 양수아를 불행한 천재의 길로 들어서도록 화도(畵道)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것이다. 미가미 교장의 권유를 수아의 아버지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당시만해도 양반의 자손으로서 비천한 화가의 길에 들어선다는 것은 엄두도 내기 힘든 일이었다. 아버지의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성품 역시 수아를 예술과 현실, 육신과 영혼, 이 불협화음의 세계로 이끄는 데 일조를 한 것이다.
그는 겸백학교 4년을 수료하고 고모가 살고 있는 일본 시모노세끼로 건너가 그곳에서 히코시마(
彦島) 소학교와 시모노세끼 공립중학교 5년을 졸업했다. 중학시절 그는 미술부에서 두각을 나타내 주위를 놀라게 했으며 운동도 좋아해 정구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양수아는 시모노세키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미야모토를 찾아가 그의 문하로 받아줄 것을 간청했다. 미야모토는 누구의 소개장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찾아온 이 조선 젊은이에게 몇 가지 그림을 그리게 했고, 그 자리에서 번뜩이는 재질을 감득했다. 그는 즉각 받아들인 뒤 삽화보다 순수회화에 정진할 것을 권유했으며 지도해주었다. 그리고는 미술전문학교인 가와바다(
川端) 미술학교의 진학을 주선해주었다. 1939, 이 가와바다 미술전문학교에는 훗날 한국화단에 족적을 남기게 되는 박고석, 배동신 뿐만 아니라 영화감독 신상옥도 재학 중이었다. 양수아는 마침내 영혼의 돛을 올린 것이다. 시인ㆍ문예비평가

 

담벽벽지공책…'보이는 건 다 그리는 아이'
따돌림
학생들도 그림에 감탄

양수아의 재능을 공식적으로 발설한 사람은 미가미 교장이었지만 그 전에 이미 동네사람들이 그의 재능을 알아봤다. 한번은 새로 바른 벽지에 그림을 그린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노여워 회초리를 들었다가 지나가던 동네사람들이 "아들이 그림을 참 잘 그린다"고 칭찬을 하자 그만 회초리를 버렸다고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그리고 싶어했다. 특히 초암산, 석호산, 보성장터 풍경, 그리고 유별난 사람들의 각양각색 옷차림 등을 책, 공책, 담벽 위에 마구 그렸다. 이때부터 이에 대한 아버지의 꾸지람과 어른들의 칭찬이 함께 귀에 겹쳤다. 특히 일본인 미가미 교장은 수아의 그림을 칠판에 걸어놓고서, 장점을 말한 다음 고칠 점을 일러주는 등 그의 재능을 매우 아꼈다.
일본으로 건너간 뒤 수아는 일본 학생들에게 심한 따돌림을 당했다. 김치 냄새가 난다며 조센진 운운하는 힘센 일본 학생과 맞서 싸우다가 그 학생을 물어뜯으며 마구 두들겨 패 항복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놀리던 일본학생들도 수아의 그림솜씨에는 저마다 감탄해마지 않았다.
그는 특히 삽화가인 마야모토 사부로를 매우 동경했다. 마야모토 사부로는 화가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미야모토 사부로를 스승으로 섬기며 가르침을 받기란 지극히 어렵고 힘들었다. 수아는 미야모토 사부로를 만난 자리에서 만약 제자로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죽어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였다. 미야모토 사부로는 말 없이 탁자 위에 놓인 꽃병을 가리켰다. 꽃병에는 매화꽃이 가지째 꽃혀 있었다. 수아는 단박에 꽃병과 매화 가지의 윤곽을 그려나갔다. 중간쯤 완성됐을 무렵, 미야모토 사부로는 손을 들어 그리는 일을 중단시켰다.
"
그림이란 완성된 것도 좋지만 중간 과정을 보고 전체의 분위기를 느낄 수도 있는 법"이라며 마침내 제자로 받아 주었다. 미야모토는 수아의 빛나는 재능을 알아봤던 것이다. 마야모토 사부로의 격려어린 지도를 받던 그는 그의 권유에 따라 마침내 가와바다 미술전문학교로 진학했다.
그 시절에 집에서 보내주겠다는 돈을 마다하고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마련했다. 아파트 관리 고용인을 시작으로 출판사의 도안사, 그리고 잡지 삽화에 이어 신문 삽화까지 맡아 그렸다. 그때에도 스승인 마야모토 사부로의 실기 지도를 종종 받았는데 삽화에 대한 평판이 좋자 '요시모토 데이아', '마쓰다 조지'라는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은 일본의 근대 회화를 개척한 오카다사 부로스케와 구로다 세이키가 이루어 놓은, 바야흐로 '문예중흥기'였다. 화단은 프랑스 유학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아방가르드나 다다이즘에 젖어 있는 화가들이 많았다. 이 새롭고 자유로운 세계가 가슴에 뛰어들면서 육신과 규약의 틀에 억압됐던 양수아의 영혼은 튀어나올 듯 설레기 시작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