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격동기의 보헤미안 양 수 아

'술의 힘ㆍ그림 몰입' 유일한 영혼의 도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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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학교 그만둔 뒤 '양수아 화실' 열어
예술의 열망ㆍ한ㆍ고통 삭이며 가난과 사투
전통회화 구속에 식상 '비구상' 으로 전환

 

양수아의 비구상 작업은 56년 광주생활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56년은 공교롭게도 추상표현주의의 선두주자 잭슨폴록이 술에 취한 상태로 차에 치어 죽은 해다.

잭슨폴록의 기념비적 무의식작업을 애도라도 하듯 양수아는 비구상작업에 뛰어든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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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생활의 주된 미술동지들은 배동신과 강용운이었다. 이들 셋은 만났다 하면 시종 미술논쟁으로 입씨름을 벌였다. 여기에 비구상작업을 도안이라고까지 매도했던 오지호까지 가세하면 좌판은 뜨거워지곤 했다. 그즈음 가장 첨예하게 미술판을 달궜던 것은 1960년 전남일보(광주일보 전신)에 게재했던 오지호와 강용운의 구상, 비구상의 논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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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회에 걸쳐 치밀하게 펼쳐간 이들의 논박은 한 치 양보도 없이 팽팽하고 맹렬했다. 광주화단은 오지호ㆍ양수아ㆍ강용운ㆍ천경자ㆍ백영주ㆍ김보현 등이 주도했는데 중앙화단보다 한 발 앞서 나가고 있어 실질적으로 한국화단을 이끌어나갔던 것이다. 이 당시를 기억하고 있는 박상섭ㆍ강연균·황영성 등은 이 시기를 '남도예술의 순수시대'라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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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아는 1961년 광주사범과 광주사대가 교육대학으로 개편되면서 광주사범 미술교사와 사범대학의 시간강사를 그만두었다. 공적 직함을 모두 내던져버린 것이다. 자유를 추구하는 불타는 영혼과 억지로 뒤집어써야만 하는 사회적 페르조나와의 충돌로 그의 신경줄은 새까맣게 타버렸을 것이다. 숙명처럼 따라붙는 사상 감시의 그물망도 북북 찢어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오직 어머니 품처럼 따뜻하고 충만감 넘치는 그림의 세계 속에서만 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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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목포와 광주생활을 합쳐 총 10년동안의 제도권 생활을 접은 뒤 자유를 선언했다. 지금의 현대예식장 건너편에 '양수아 화실'을 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자유선언은 곧바로 극도의 가난과 직면하는 길이었다. 그곳에서 제자들을 지도하고자 했으나 수강생은 모이지 않았다. 당시 월 수강료는 1500원이었는데 어쩌다 돈이 들어오기라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술집으로 직행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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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의 단골술집은 전일빌딩 옆의 오센집, 중앙로가 열리기 전, 당시의 보훈청 옆 선선집, 황금동의 기미코집 등이었다. 이곳엔 역시 오지호ㆍ최용갑ㆍ임직순ㆍ강용운ㆍ배동신 등이 무시로 드나들었다. 특히 오센집의 풍경은 가관이었다. 오생원집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었는데 모두들 도깨비 대학이라고 부르곤 했다. 이 주점은 도시 한복판에 자리잡은 당시의 유일한 문화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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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세발낙지와 탁배기, 까무잡잡한 김치가 다정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뚱뚱이 오센마담과 콧구멍에 노르께한 물기가 가시지 않는 오센영감은 가난한 예술가들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항상 이곳은 웃고 떠들고, 노래하는 왁자지껄함의 복판이었지만 단골 화제는 언제나 미술이었다. 이 열띤 토론은 끝내는 다툼으로 번지기가 일쑤였다. 이곳은 광주문화를 이끌어가는 당대의 첨예한 문화 논쟁터였던 것이다. 광주미술을 주도해가는 박상섭ㆍ강연균ㆍ우제길 등이 이 도깨비대학의 마지막 졸업생들이다. 이곳에서 예술의 열망과 한()과 고통을 고스란히 삭이며 젊은 시절을 불태운 마지막 주자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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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양수아는 언제나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의 미야모토 무사시의 검법 강의, 젓가락으로 파리잡는 흉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해박한 지식 등은 모든 사람을 그의 주위로 몰려들게 했다. 특히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빗자루를 양산처럼 돌리며, 줄타는 흉내를 내는 부르는 '서커스의 노래'는 모두를 박장대소하게 했다. 그는 그림에의 몰입과 술의 힘을 빌린 광대짓으로 도피하지 않으면 황량한 현실 앞에서 쓰러질 수밖에 없는, 타고난 보헤미안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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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는 본격적으로 비구상으로의 도피를 시도했다. 기존의 전통회화에서는 질식할 것 같은 구속감을 느꼈다. 그런 규격을 벗어버리고 폭발할 것 같은 행위를 통해 자유로운 본능과 정신의 해방감을 맛보고 싶었다. 그는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미친 듯이 비구상 작업 속을 헤엄쳐다녔다. 그럴 때만 상처받은 영혼은 싱싱하게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그의 정신은 현실에 머물 땐 우울했고, 그림 속에 머물 땐 언제나 황홀했다. 그는 그림 속에서 울증(鬱症)을 조증(躁症)으로 견인해내는데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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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통해 양수아의 조울증을 바라보며 관객들은 모두가 아픔을 치유받는다. 구상에서 비구상으로, 우울에서 황홀로 뛰어오르는 감동의 순간에 우리의 가슴에선 새떼처럼 기립박수가 날아오르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이미 치유되었음을 느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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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ㆍ문예비평가

사랑. 1950년대 말. 19.2x26.5. 개인소장.
● 1970
년대 초반. 장지에 유채. 32x23.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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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 1950년대 초반. 종이에 수채. 26.8x20.4.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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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
년 이사한 집에서 양수아ㆍ곽옥남 부부

오센집이 있던 자리. 현재 궁동 전일빌딩 옆 건물.

 

해장술 마시다 다툰 깡패들, 나중엔 형님-동생 인연으로
양수아와 술

양수아의 술에 얽힌 비화는 무수히 많다.

그날은 비가 오는 아침이었다. 전날 술이 덜 깨서 광주 계림동 단골가게에서 해장을 할 요량이었다. 막 맥주 한병을 시켜 마시려는데 마침 낯익은 제자 한 명이 지나갔다. 그는 호쾌하게 제자를 불렀다. ", 이리와라!" 무심코 뒤를 돌아본 제자는 깜짝 놀랐다. 아침부터 자신의 은사가 술을 마시고 있는 게 아닌가.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제자는 "선생님, 죄송합니다." 하며 꽁무니를 빼고 말았다.

양수아는 순간 화가 났는지 술 취한 목소리로 "! 임마!" 하고 크게 소리를 질러댔다. 공교롭게도 그 순간 그 곳에는 험상궂게 생긴 불량청년 3명이 지나가고 있었다. 뒤돌아본 청년들이 순식간에 다가왔다."왜 그러슈? 불렀으면 뭔가 말이 있어얄 게 아냐!"

당황한 양수아는 손사래를 치며 "노우. 당신들이 아냐."

급하게 변명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지 못해 안달이 난 청년들은 "허허, 낫살깨나 먹은 양반이 왜 이러실까. 손을 좀 봐달라는 거구만."

손매듭을 꺾으며 으름장을 놓는 것이었다. 그 순간 양수아는 침착하게 레인코트를 벗어서 의자에 걸어놓고 우산을 든 채 길 한복판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우산을 세워든 채 검도자세를 취했다.

"
그래 느그덜이 계림동에서 놀아먹는 놈들이구먼. 잘 걸렸다. 알랑가 모르겄다마는 내가 검도 4단 양수아다."

불량청년들은 흠칫 기가 꺾이고 말았다. 양수아의 자세가 워낙 완벽해보였던 것이다. 양수아는 "내가 늬들 정도는 내리치기가 아니라, 찌르기로 상대해주지!"

겁을 주면서 한 발 한 발 청년들에게 나아갔다. 청년들은 순식간에 사태가 심각함을 느꼈다. 그들은 서로 눈짓을 나눈 뒤 황급히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아이고, 형님 저희가 사람을 잘못 알아봤습니다."

양수아의 검도동작은 일본에서 중학시절 배운 기본동작에 불과했다. 그러나 삽시간에 이 소문은 계림동 일대에 퍼져 양수아는 전설적인 인물처럼 돼버렸다. 이때부터 계림동 일대의 깡패들이 모두 양수아를 형님으로 떠받들며 깍듯이 대했다. 그가 술에 취하면 어김없이 집까지 바래다주곤 했다.

그런데 516직후 폭력 전과자들은 모두 국토건설단으로 동원돼, 도로공사장에 투입됐다. 어느날 양수아가 길을 가는데 도로공사를 하고 있던 인부중의 한사람이 불쑥 나서며 "형님"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바로 계림동 주먹계의 보스였다. 마침 가진 돈이 없던 양수아는 길가의 가게로 그를 끌고 들어가 시계를 풀어놓고 둘이서 실컷 맥주를 마셨다는 것이다. 술과 삶이 하나로 화합해가는 과정에서 이뤄낸 양수아의 행위예술 한 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