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격동기의 보헤미안 양수아

빨치산 문화공작대서 활동배낭엔 늘 물감이 들어있고
'
빨치산' 작가 이태와 활동 직접 공격전투엔 참가 안해

동상으로 한쪽 발까지 절어

 

양수아는 입산 후, 이현상부대 81사단 정치부로 차출돼 문화공작대로 편입됐다. 빨치산, 즉 이태 씨의 소설로 잘 알려진 남부군이 된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낙랑왕자와 호동왕자를 쓴 카프작가 이동규, 평양 출신의 시인 이명재, 문화지도원 최문희, 신문과 전사를 담당한 이태 등과 함께 문화공작대로 활동했다.

이태가 쓴 '남부군'에서의 증언에 의하면


우리들은 무장은 갖추고 있었지만 직접 공격전투에 나가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이렇다할 문화공작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한두 번 대원들에게 '마을 인민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것을 쓰게 해서 보급투쟁 때 뿌린 것 외에는 노래공부나 교양강좌 그리고 그림극 정도가 우리가 한 문화공작의 전부였다. '민중운동'이니 '적진와해공작'같은 것은 시도해볼 여유도 없었다. 겨울철로 접어들면서 보초선 순찰, 대열 수습, 일부 전투의 지휘 등 군사적인 역할이 오히려 주된 과업으로 되었다. 하는 일이야 어떻든 정치부원들은 식구가 단촐하고 소위 '문화인'들이 돼서 서로 쉽게 어울렸을 뿐만 아니라 전투대에 비해 일신도 훨씬 편했다
.”

또 이런 일화도 기록돼 있다
.

“52
2월 남부군이 거림골 무기고 본부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양수아는 이동규의 얼굴을 스케치해서 '이 선생의 빨치산 모습'이라는 제목을 달아 그에게 주었다. 이동규는 좋은 기념품이 생겼다며 배낭에 고이 간직하고 다녔다. 그런데 그해 5월 남원수용소의 사살된 빨치산의 배낭에서 그 그림이 발견되었다. 이동규는 토벌대에 의해 사살된 것이다. 죽은 그의 발은 동상으로 반쯤 썩어있었다
.”

그 당시 빨치산은 추위로 인해 거의 손과 발 등에 동상을 달고 살았다. 양수아도 그 시절 동상으로 인해 한쪽 발을 절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

양수아는 항상 배낭 안에 종이와 물감을 지니고 다니면서 그림그리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산속에서 부대원들의 모습을 그려주기도 했다. 선전공작대로서 그림을 통한 심리전을 하던 그는 정치위원의 지시로 이태가 구상한 이야기에 그림을 그려 그림극을 만들어 마을에 내려가서 마을 사람들에게 구경시킨 일도 있었다
.

빨치산 활동으로 그린 그림은 대부분 그림극의 장면들이었다. 이 그림들은 부대원들이 돌려가며 보기도 했고 마을에 내려가 벽에 붙여놓고 오기도 했다
.

또 그는 또 기억력이 유별나서 일본의 검객소설 '미야모토 무사시'를 끝까지 다 외우고 있어 심심할 때는 그것으로 시간을 잊게 해주었다
.

이들 정치부원 중에서도 박형규와 양수아, 이 태 이 세 사람은 연배가 비슷하고 말도 잘 통해 무척 친밀한 사이로 지냈다. 서울말을 쓰는 이 태와 심한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박형규, 또 심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양수아가 함께 어울리며 농담을 주고 받는 것은 듣는 다른 요원들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그들을 서로 성격이 특징적이면서도 잘 어울리며 지극히 사이가 좋았다
.

또 그들에게 양수아는 수시로 전라도의 '개땅쇠'론을 펼치곤 했다
.

남도에는 유달리 만석군, 천석군이 많다. 그 것은 남도가 농토가 넓고 비옥해서 대지주가 생겨날 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도에 예술이나 요리가 발달한 것은 그런 지주계급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지주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농노계급이 많다는 의미도 된다. 상대적으로 소수의 큰 부자와 한많은 다수의 극빈자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개화기가 되면서 극빈자들은 도시를 찾아 타향으로 흘러갔고, 그들을 살기 위해 체면이나 술수를 가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 강인한 생활력 때문에 개땅쇠라는 별명이 생겼다. 그리고 그 것을 불식하는 방법은 결국 혁명적 토지개혁과 사회주의 경제밖엔 없다.”라고 강변하곤 했다
.

훗날 이때의 상황을 시인 이성부는 그의 시에서 이렇게 그리고 있다
.



"
낮에는 조릿대밭에 엎드려 쥐 죽은 듯 포스터를 그리고 글씨를 쓰고 숨 죽이며 울었다 밤이 되면 조심스럽게 마을 뒤로 맴돌다가 빈집 같은 곳 상여집 같은데를 뒤져먹이를 찾아 헤매는 짐승처럼 눈에 불을 밝혔다


흙 묻은 무말랭이 시래기 몇가닥 주워 털어 입에 쑤셔넣고 바쁘게 씹어 삼키고 개울물 두 손 바닥으로 퍼마시고 내려왔던 길 도로 올라가 몸을 눕혔다.

댓잎 사이로 쏟아지는 별들 추워도 바람소리 죽은 동무들 외침소리 나를 덮어도 등 뒤에 깔린 솔가지들 있어 몸 떨리지 않았다
.

결코 죽어서는 안된다라고 살아서 반드시 어린 것을 품에 안아야지라고 나는 나에게 눈 부릅떠서 말했다


내일을 터진 고무신 전깃줄로 동여매고 어디로든 옮겨 선을 찾아야겠다."

*
: 빨치산 용어로 본대와 연결이 되는 것을 뜻함
.

-
이성부
'화가 양수아의 빗점골 회고' 전문

시인ㆍ문예비평가



낮에는 조릿대밭에 엎드려 쥐 죽은 듯포스터를 그리고 글씨를 쓰고 숨 죽이며 울었다

밤이 되면 조심스럽게 마을 뒤로 맴돌다가 빈집 같은 곳 상여집 같은데를 뒤져 먹이를 찾아 헤매는 짐승처럼 눈에 불을 밝혔다

흙 묻은 무말랭이 시래기 몇가닥 주워 털어 입에 쑤셔넣고 바쁘게 씹어 삼키고 개울물 두 손 바닥으로 퍼마시고 내려왔던 길 도로 올라가 몸을 눕혔다.

댓잎 사이로 쏟아지는 별들 추워도 바람소리 죽은 동무들 외침소리 나를 덮어도 등 뒤에 깔린 솔가지들 있어 몸 떨리지 않았다
.

결코 죽어서는 안된다라고 살아서 반드시 어린 것을 품에 안아야지라고 나는 나에게 눈 부릅떠서 말했다


내일을 터진 고무신 전깃줄로 동여매고 어디로든 옮겨 선을 찾아야겠다.

이성부
'화가 양수아의 빗점골 회고' 전문




양수아 입산 이후 곽옥남은 자신이 얼마나 양수아를 사랑하는 지를 깨달았다. 신문 방송을 통해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에 관한 끔찍한 뉴스를 들은 날은 어김없이 그가 꿈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제발 무사하기만을 바라는 초조한 나날이 시작됐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결혼 재촉이 나날이 강도를 더해갔다. 입산한 양수아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부모님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결국 곽옥남은 결혼을 재촉하는 아버지의 성화를 피해 부산으로 피신해 선박회사에 취직했다. 그리움과 불안감이 뒤범벅이 된 나날이 이어졌다
.

그해 7월 개성에서 북한과 미국 중국이 참가한 가운데 휴전회담이 열렸다. 주요 의제는 군사경계선 설정문제, 휴전 실시를 위한 감시기관 구성문제, 포로교환 문제 등이었다. 남한정부는 참여에서 제외된 채 그저 휴전회담을 반대하고 있었다
.

1952
년 접어들어 휴전회담이 늘어지는 사이에 전투는 더욱 치열해져만 갔다. 또한 전쟁이 길어지면서점령군이 바뀔 때마다 전쟁과 직접 관련이 없는 민간인들이 학살, 처형, 굶주림 등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으로 양수아의 무사를 기대하는 곽옥남의 마음은 타들어갔다. 그 사이 한 통의 편지가 인편을 통해 목포 대성동 곽옥남의 집을 휘돌아 그녀가 근무하는 부산시의 초량동에 있는 선박회사까지 날아들었다. 편지에는 아미라는 곽옥남의 새이름까지 곁들여져 있었다
.

"
내 마음 변치 않고 너만을 영원히 사랑하는 양수아다. 내가 살아서 돌아왔다
."

양수아는 빨치산 토벌대에 의해 체포되어 포로로 수용된 뒤 풀려난 즉시 곽옥남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

"
이 사람은 교사로서 후진 양성에 공도 많고 절대로 사람을 죽인 일도 없어 전혀 죄가 없다."라는 내용의 탄원서 100여통 이상 진정되었고, 이에 힘입어 양수아는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마침내 양수아가 다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