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격동기의 보헤미안 양수아

"수아는 한폭의 그림에도 철학을 꿈꿨지요"
'
시대의 벼랑'서 술꾼으로 살아갔고

우제길ㆍ황영성 등도 미술지도 받아
삶 내면엔 고흐처럼 '조울증'에 좌절

 

1956 5 1일 양수아는 광주사범 미술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광주사범의 강용운이 광주사범대학 미술과로 올라가면서 후임으로 양수아를 추천했던 것이다. 이즈음 가까이 지내던 김하증 변호사는 목포일보에 '떠나는 수아'라는 제목으로 이런 글을 실었다. 미네르바 다방에서 부부전인 '이목전시회'를 열고 있을 때였다.

"
화도(畵都) 목포를 성분 좋고 단위 높은 비료로써 살찌게 하고 무한한 약동을 마련한 수아가 떠난다 하니 어찌 섭섭하지 않겠습니까만 목포의 벗과 술을 어이 잊고 떠나려 하는지 불안도 없지 않습니다. (중략
)

그의 화폭은 몇 잔 대포술에 얼큰하여 토로하는 유쾌한 독설을 연상케 합니다. 옛 작품 '강강수월래'의 청색 환상은 그의 눈물이며 최근에 보여준 주호(酒壺)가 섞인 '정물'은 그의 향수이며 강인한 선과 명랑한 색채는 그의 생활 의욕이며 예술가로서 하나의 모순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생활을 애써 괴로워하나 생활에 구속되지 않는 무서운 화가입니다. 또한 그는 작화의 발전이 현실의 불안과 초조 그리고 절망에서 해탈하려는 생활의 투지가 엿보인다는 것입니다. 좋은 경향이겠지요. 그는 어려운 그림을 그리려 합니다. 피카소와 파리 화단의 귀재 '뷔페'가 되려 하는지도 모르나 병적인 대상물이 '테마'가 아닌 것만은 틀림없겠습니다. 수아는 지성의 화가입니다. 그는 한폭 그림에 철학을 꿈꾸려 합니다
."

이목전으로 이별을 고한 뒤 양수아는 가족을 이끌고 광주로 올라왔다. 당시 광주사범학교의 교장은 이창업, 교감은 김주성, 교무주임이 신근우였다. 이들과는 불과 며칠도 지나지 않아 흉허물없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모두가 시대의 아슬아슬한 벼랑을 오르면서 술의 힘을 빌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술꾼들이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양수아는 이들과 함께 광주의 대표적 유곽촌 황금동으로 진출했다. 목포 오거리에서 광주 황금동으로 우울의 치료처가 바뀐 것이다.

매일같이 퇴근 후면 황금동을 휩쓸다가 밤 깊어지면 고주망태가 돼 기다시피 집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아침이면 말짱한 정신이 돼 어김없이 학교로 출근하곤 했다. 교사로서는 매우 근면했다고 주위사람들은 증언한다.

당시 광주사범에 재학중이던 최종섭에 의하면

"
수업중에 더러 술냄새를 풍기기도 했지만 그의 강의는 매우 열정적이었으며 자상했다. 특히 잘된 곳은 열심히 지적해주었다."고 한다.

현재 그의 제자들은 우리 화단의 중견작가들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최종섭ㆍ우제길ㆍ김종일ㆍ최재창ㆍ박남 등 '에뽀크'를 중심으로 활약한 비구상 작가들과 황영성ㆍ이태길ㆍ강길원 김성식ㆍ김충곤ㆍ방순희 등 구상작가들이 모두 그의 미술지도를 받았다.

 

제자들의 말에 의하면 비구상을 권한 적이 전혀 없었으며 비구상 그룹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는 '에뽀크' 창립에 있어서도 그가 "영향을 미쳤을지는 모르지만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광주에서도 사상문제로 인한 형사들의 감시망은 여전했다. 그 감시망은 단순한 감시가 아니라 언제나 금전의 착취로 이어져서 고통을 가중시켰다. 이러한 혹독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은 언제나 술과 그림밖에 없었다.

당시 같이 어울렸던 시대의 술꾼들 말에 의하면

"
술이 취하면 시원시원한 발성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장기였으며 돈에 대해서는 거의 백치에 가까워 자신과 남의 주머니 사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예술적 감성이 예민한 그에게 시대는 너무 잔인했다. 그의 청결한 감성은 리트머스 용지처럼 시대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예술가의 감각판은 극명하게 떨어주는 시대의 공명판이기 때문이다. 혹독한 현실의 지평에 서 있을 때면 심한 우울이 그를 죽음의 문 앞으로 내몰곤 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술을 마셨고, 과대포장의 조증(躁症)쪽으로 안간힘을 쓰며 정신을 밀어부칠 수밖에 없었다. 광주시절의 이 시점부터 그의 조울증이 본격적으로 도발된 것이다.

조울증은 조증과 울증이 반복되는 증상을 말한다. 조증의 병리적 정의로는 신경 호르몬인 도파민이 과다하게 분비되는 병을 이른다.

 

조울증은 상쾌감정을 주로 하여 흥분상태를 나타내는 조() 상태와 비애, 불안의 감정을 주조로 하여 울() 상태가 계속해서 교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조증 때는 두뇌 회전이 매우 빠르고, 암기력도 좋아지고, 아이디어도 잘 떠오르며, 누구나 부러워하는 두뇌 회전 능력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밤새 2∼3시간밖에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도 않고, 책은 읽는 대로 모두 그 내용이 기억되며, 기발하고, 좋은 아이디어 등이 순식간에 떠오르기도 한다.

많은 예술가들이 조울증을 앓았으며 그 대표인물로 울증 상태에서 귀를 자르고 권총자살을 시도했으며 조증 상태에서 황홀한 해바라기를 그려낸 '빈센트 반 고흐'를 들 수 있다.

양수아의 삶과 그림을 들여다보면 고흐에게서 처럼 심한 조울증을 엿볼 수 있다. 살아남기 위해 그는 본능적으로 정신을 현실 바깥쪽으로 변속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양수아의 조울증은 처절한 생존형이었다. 살아남지 않으면 그는 자유로운 영혼의 세계를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과, 육신에 갇혀있는 모든 이들에게 보여줄 수 없으므로. 시인ㆍ문예비평가

 

그때 그 순간
겁많고 외로움 많던 그분 훌륭한 스승이자 내남편

 

선생님은 항상 술을 드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술 기운을 빌려서 자기 마음을 잊어보려 했던가 봐요. 겁이 많으셨고, 외로움을 못견뎌 하셨어요. 그래도 달 밝은 밤이면 산책을 하자고 그래요. 옛날에 풍향초등학교 자리가 잔솔밭이거든요. 그리 몇 번 산책을 갔네요. 술 마셔 가면서, 노래도 부르고 나보고도 부르라 하고, 한마디로 멋진 사람이었는데 멋지게 살지 못하고…. 마음은 굉장히 멋쟁이셨는데.

선생님은 책도 정말 많이 읽었어요. 일본문학을 좋아했죠.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사랑의 가집(歌集)에 실린 시를 함께 읽곤 했어요. 이시카와 다쿠보구의 가난한 삶이 정말 선생님과 많이 닮았어요. 특히일을 해도, 일을 해도 생활은 나아지지 않고라는 구절은 가슴을 치데요.

선생님은 정말 현실에 무관심했죠. 아니 무관심할 수밖에 없잖아요. 현실적으로 돈이 없으니까 모른 척 할 수밖에 없었겠죠. 항상 형사들에게 돈을 뺏기고. 그러니 쌀값이 얼만지도 몰랐지요.

정말 옛날에요. 쌀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때는 쌀 있는 집이 젤 부럽드라구요. 됫박쌀로 계속 팔아다 날렸어요.

그래도 식구들은 많고 한 솥단지 내놓으면 다 없어지고. 지금 제가 이렇게 혼자 살아도요. 식은 밥을 버리는 법이 없어요. 어떻게 해서든지 요긴하게 하지 함부로 하지 않아요. 쌀집에 가서 좋은 쌀 사다 먹어야지 해도 딱 가서 사려고 하면 그 생각이 들어요.

내가 밑에다 보리놓고 그 위에 혼합곡 놓고, 맨 위에 쌀 한주먹 놓아서 애기들 도시락 푸고 나면 보리만 엉성해가지고. 그놈을 놓고 울었어요. 보리밥 먹기 싫어서. 그런 지난 날을 생각하면 내가 어떻게 조금 있다고 해서 좋은 쌀만 먹을 수 있겠어요.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렇지만 여태까지 살아온 내 방법이고 또 나쁘다고 생각지도 안해요. 애기들 보고도 항시 "과거 없는 현재 없고 미래없다" 고 그러네요.

애기들 보고도 아버지 얘기를 할 때면 언제나 정말로 인간적이었다는 말을 늘 하네요. 영화를 좋아하셨는데 애기들 데리고 제일극장에 간 적이 있었어요. 특히 찰리 채플린을 좋아하셨는데 먼가 통하는 것이 있었나보데요. 겉으로는 웃기면서도 안으로는 우는 그런 것이요. 안소니 퀸 나오는 길이라는 영화도 아이들 하고 함께 봤네요. 가난했지만 언제나 감성이 풍부했고, 따뜻했어요. 나는 아이들한테 이런 인간적 따뜻함을 남겨준 것이 너무나 고마워요. 돈을 남겨주면 빥하겠어요. 내게는 정말로 훌륭한 스승이자 남편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