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격동기의 보헤미안 양수아

日 유학시절 석굴암 석불 보고 '감동의 눈물'
'
일본풍' 떨치고 정체성 찾으려 노력

중국서는 술ㆍ담배 않고 오직 그림만
해방공간ㆍ625…혹독한 운명 기다려

 

동경유학생활은 고되고 힘들었지만 생의 중요한 학습기였다.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출판사의 도안사, 아파트 관리인, 신문잡지의 삽화 그리기, 화구점과 악기사의 점원 등의 일을 했다. 그의 그림에 춤추는 듯한 율동감이 스며있는 것과 늘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던 습관은 이 시기에 비롯됐다. 그는 이 시기에 기타와 하모니카 연주를 익혔으며 그 솜씨는 탁월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시기에 주목되는 점은 그의 삽화 그리기 아르바이트다.

당시 일본 화단에는 서구 아방가르드나 다다이즘이 물밀듯이 밀려들고 있었다. 삽화 그리기와 아방가르드, 다다이즘 분위기는 그의 가슴에 추상이라는 자유롭고 화려한 영혼의 장르를 각인시켰다
.

양수아 정신세계 형성은 일본적 풍토와 교육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가슴 한 구석에서는 늘 일본화풍을 털어 버리고 한국적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요동치고 있었다. 실제로 불국사 석굴암의 불상이나 화엄사의 쌍사자 석등에서 깊은 한국적 미감을 발견하고 작품화하기도 했다. 한 사찰의 새로 갈아 끼운 기둥부분의 미적 부조화를 지적할 만큼 한국미에 대한 안목을 내보이기도 했다. 가와바다 학교를 졸업할 무렵 오랜 지우 조용근에게 구두 닦는 늙은이 그림을 선물했다. 이 작품에서 이 시기의 한국미에 대한 그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
동경 유학시절 양수아는 방학을 맞이해 고향을 찾은 적이 있다. 그때 양수아는 오랜 친구 조용근(1919~, 교육자)과 함께 지리산 화엄사를 여행했다. 그곳에서 쌍사자 석등 등의 아름다움에 연방 감탄을 쏟았다. 조용근은 그 시절을 이렇게 술회한다
.

당시 마네, 모네, 드가, 세잔, 르느와르, 고흐 등의 이름을 자주 들먹였는데 수아는 미술 작품과 사물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눈이 대단했어요. 한 번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내가 미술 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린 적이 두 번 있었다. 석굴암의 석불을 본 순간, 그 위대함에 너무나 감격스러워 눈물이 나더라. 차가운 화강암으로 된 석불의 체내에 뜨거운 피가 쉼없이 흘러 그 체온이 내 몸 속으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 한번은 렘브란트의 그림 앞에 서는 순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

 

1942년경 양수아는 마침내 베이징을 향해 떠난다. 베이징을 거쳐 미술의 본 고장이라 할 수 있는 파리로 건너가기 위해서였다. 일제의 강제징용을 피하고 미술에 대한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불안한 세계 정세는 그의 베이징을 경유한 파리행을 좌절시키고 말았다. 여행이 통제돼 만리장성에서 길이 막히고 만 것이다. 그는 무작정 중국의 안동에서 내려 화구상을 운영하고 있는, 친분있는 일본인을 찾아갔다. 그는 이곳에서 화구상 일을 거들면서 안동신문사의 삽화일을 맡게 됐다. 이곳에서 순식간에 그의 삽화실력은 높이 평가돼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삽화실력으로 안정감 있는 생활을 이어가게 된 그는 동생인 회기를 이곳으로 불렀다. 수아는 당시 일본인의 집에서 하숙을 하였다. 이 시절을 함께 지낸 회기에 의하면 수아는 당시 술·담배는 전혀 하지 않은 채 엄격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일요일이면 화구를 챙겨들고 야외로 나가 화폭에 풍경을 담았으며 퇴근 후에도 어김없이 캔버스 앞에 앉곤 했다. 때때로 그는 동생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까지 가서 한국 음식을 먹기도 했다. 44년에는 그의 지우인 조용근을 초청하기도 했다. 경제난이 심각했던 한국이나 일본에 비해 그곳은 각종 물자가 넘쳐났다. 이곳에서 수아는 그의 첫 번째 아내인 아베 에스코(
安部悅子)를 만나게 되고 1943년부터 1946년까지 그곳에서 에스코와 동거에 들어갔다.